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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과학자들] TV·라디오·전기 발명하고도 빚더미에, 자살에…
작성일 200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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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과 라디오는 누가 처음 발명했을까? 영화 카메라는 누가 처음 만들었나?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최초의 발명자가 명예를 얻지 못하고 대중의 기억에서 금세 사라졌기 때문이다. 역사에는 획기적인 발명·발견을 하고도 남에게 이를 빼앗기거나 경쟁자의 농간 때문에 추락한 인물이 많다. 일부는 뒤늦게 명예를 회복하기도 하지만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영국 SKY TV는 지난해 12월 영국 최초의 고해상도TV(HDTV) 방송을 시작하면서 첫 프로그램을 스코틀랜드 출신의 발명가 존 베어드에게 바쳤다. 이 프로그램은 베어드가 1926년 1월 최초로 TV를 공개 시연한 런던의 한 빌딩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됐다. 초청을 받은 존의 아들 말콤 베어드는 “아버지가 발명한 TV가 80살이 됐다”며 인사말을 했다.

80년이 흐른 지금, TV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존 베어드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욱이 그가 1928년 최초로 컬러TV를 시연하고, 1940년대에 이미 고해상도TV (HDTV)를 개발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베어드는 특수안경 없이도 입체화면을 볼 수 있는 입체TV를 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어드의 발명품은 빛을 보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TV는 요즘의 TV와 달리 빠르게 회전하는 디스크에서 빛을 쏘는 기계식 TV였다. 그는 이 방식으로 고해상도의 화질을 구현했다. 그러나 기계식 TV는 전자식 TV가 너무 빨리 등장한 탓에 빛을 보지 못했다. 선천적인 질병으로 고통받았던 베어드는 연속적인 사업 실패를 견디지 못하고 1946년 세상을 떠났다.

이보다 앞서 20세기 초 미국에서 활동한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는 수완이 너무 뛰어난 경쟁자를 만난 탓에 비운의 삶을 살아야 했다. 테슬라는 교류(AC) 전기와 라디오 등 수백 건의 발명을 한 당대 최고의 천재였다. 그러나 그는 경쟁자였던 토머스 에디슨과 구글리엘모 마르코니의 견제를 받아 뜻을 펴지 못하고 ‘미친 과학자’라며 손가락질을 받았다.

경쟁자에게 특허권을 빼앗긴 경우도 있다. 미국의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사는 베어드와 테슬라의 경쟁자였던 마르코니가 설립한 회사로, 라디오와 TV로부터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이 회사는 자사의 AM(Amplitude Modulation)방식의 라디오 사업을 보호하기 위해 남의 특허권을 빼앗기도 했다. FM 라디오의 발명자인 에드윈 암스트롱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뉴욕 아파트 13층에서 투신 자살했다.

존 베어드(John Baird)는 1888년 스코틀랜드 헬렌스버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병약한 체질이었지만 어려서부터 발명에는 남다른 천재성을 보였다. 또래 친구들이 실로 깡통을 연결한 장난감 전화를 가지고 놀 때 그는 전기로 작동하는 전화와 교환기를 만들었다. 자신의 방에 교환기를 설치한 뒤 이웃의 친구 집 4곳을 전화선으로 연결해 미니 전화망을 구축했던 것. 그의 유년시절 발명품 중에는 전등과 비행용 글라이더도 포함돼 있었다.

텔레비전은 당시 과학자들의 꿈이었다. 초창기 텔레비전의 이론적 원리는 1883년 독일 과학자 폴 니프코가 처음 제시했다. TV 카메라는 작은 구멍을 나선형으로 뚫은 원반을 빠른 속도로 회전시키면서 이 구멍을 통과한 빛을 전기신호로 바꾼다. TV 수상기는 전송된 전기신호를 빛으로 바꾼 뒤 카메라와 똑같은 속도로 회전하는 원반의 구멍 틈으로 스크린에 영사한다. 회전하는 원반은 주사선 효과를 내면서 흑백 영상을 만들 수 있었다. 니프코는 이 원리를 이용한 TV를 만들지는 못했다.

베어드는 1922년부터 니프코의 원리를 이용한 텔레비전 제작에 착수했다. 1924년 2월 정지된 물체의 윤곽을 전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1925년에는 사람의 얼굴을 겨우 알아볼 수 있는 TV를 개발했다. 운동하는 사물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텔레비전은 1926년 1월 26일 공개실험에 성공했다.

베어드는 이후 한동안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했다. 그가 설립한 BTDC(Baird Television Development Company)는 1928년 런던과 뉴욕 간 최초 TV 중계에 성공했다. 또 영국 BBC 방송은 1929년부터 베어드 방식의 TV 방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베어드가 만든 TV 수상기가 조금씩 팔리기 시작할 무렵 전자식 TV가 등장했다. 순식간에 기계식 TV는 낡은 유물로 전락했다. BBC도 1937년 베어드의 기계식 TV를 버리고 마르코니의 전자식 TV를 채택했다.

베어드는 TV 사업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개발과 시장개척에 나섰다. 그는 소규모 극장에서 영화상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고해상도TV(HDTV)를 개발했다. 1941년 주사선 600개의 컬러TV를 공개했고, 1944년에는 주사선 1000개 이상의 고화질 컬러TV를 채택하도록 영국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 성과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당시 상황 속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베어드는 말년에 자신이 개발한 고해상도TV를 가지고 런던과 파리 등을 순회하며 시연회를 가졌다. 그러나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1946년 심장마비로 숨졌다. 베어드의 기계식 TV는 현재 런던 과학박물관에 전시품으로 남았다.

미국의 발명가 에드윈 암스트롱은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암스트롱은 FM 라디오를 발명했고 라디오 관련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그는 특허분쟁에 휘말렸고 라디오 업계의 ‘FM 죽이기’에 시달리다가 결국 투신 자살했다.

암스트롱은 1933년 FM 라디오를 발명했다. FM(주파수 변조)은 라디오 전파에 음성정보를 실을 때 진폭이 변하는 AM(진폭 변조)과 달리 주파수가 달라지는 변조 방식이다. FM은 AM 라디오에 비해 음질이 선명하고 전파의 간섭을 적게 받는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암스트롱은 미 연방통신위원회(FCC)를 설득해 42~49Mhz의 FM 라디오 주파수 대역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는 1940년대 독립 FM 라디오 방송망 구축을 지원했다. 그는 또 FM이 AM 라디오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일반에 알리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FM 라디오는 이미 거대기업으로 성장한 RCA(Radio Corporation America)를 위협했다. RCA는 AM 라디오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RCA는 정부를 상대로 FM 라디오의 확산을 막기 위한 로비를 벌였다. 1945년 FCC는 기존 FM 라디오의 주파수 대역을 회수, TV 채널에 재할당했다. FM 라디오에는 88~108Mhz 대역을 대신 제공했다. 이 조치로 이미 팔린 FM 라디오 수신기들이 무용지물이 됐고, FM 방송국의 상당수가 문을 닫았다. FM 라디오의 보급은 수십 년 지연됐다.

RCA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들이 FM 라디오를 발명했다고 주장하며 암스트롱의 특허권을 빼앗았다. 암스트롱과 RCA의 특허권 소송은 RCA의 승리로 끝났다. 암스트롱은 경제적으로 파산하고 정신적인 충격에 휩싸였다.

이런 부당한 경험은 암스트롱에게 처음이 아니었다. 암스트롱은 1922년 자신이 발명한 라디오 회로 기술과 관련해 특허권 소송에 휘말렸다. 암스트롱과 AT&T 간에 12년간 지속된 특허권 분쟁에서 암스트롱은 결국 패배했다. 미국 대법원은 1934년 AT&T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당시 대법원의 결정은 기술 분야에 대한 무지에서 빚어진 잘못된 결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암스트롱은 잇따른 불운에 좌절했다. 그는 1954년 1월 31일 자신의 뉴욕 아파트 13층에서 투신자살했다. 그가 숨진 지 10여 년이 흐른 1967년 암스트롱의 유족은 RCA를 상대로 FM 특허권 소송을 다시 제기해 승소판결을 받아냈다. 그리고 FM은 AM 라디오를 누르고 대표적인 라디오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이름은 1980년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등재됐다.

미국으로 이민 온 세르비아 출신의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는 비운의 천재 명단에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테슬라는 현대의 가정이나 공장에서 사용하는 전기, 즉 교류전기(AC)를 최초로 발명했다. 교류전기는 20세기의 2차 산업혁명을 일으킨 원동력 중 하나다. 테슬라는 이밖에 라디오와 리모컨을 발명했다. 100여건에 이르는 테슬라의 발명 특허는 대부분 획기적인 것이었다. 지금도 그의 연구 노트를 뒤적이며 신기술을 찾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상당수 역사가들은 테슬라를 토머스 에디슨을 능가하는 최고 발명왕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그의 이름은 낯설다. 그는 당대에 자신의 공로를 인정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미친 과학자’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오랫동안 사람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테슬라는 1856년 크로아티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세르비아 정교회 성직자였고 어머니는 정교회 성직자의 딸이었다. 헝가리와 프랑스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던 그는 188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그는 토머스 에디슨 밑에서 전기 관련 연구를 주도했다. 그러나 에디슨이 약속했던 성과급 5만달러를 “농담이었다”며 지불하지 않자 사표를 냈다.

이후 그는 낮에는 일반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 연구를 해 1887년 교류 발전기를 발명했다. 그는 웨스팅하우스일렉트릭사(社)의 연구실로 자리를 옮겨 교류전기의 발전 및 송·배전 시스템을 완성했다. 테슬라는 이 시기에 교류전기 이외에도 사람의 뼈를 촬영할 수 있는 X선 튜브와 라디오(무선 전신) 등을 발명했다.

테슬라는 1897년 마르코니보다 앞서 라디오에 관한 미국 특허를 출원했다. 1898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모인 군중은 니콜라 테슬라가 라디오 전파를 이용해 무선으로 배를 조종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그러나 테슬라의 라디오 특허권은 1904년 마르코니에게 넘어갔다. 마르코니와 에디슨, 앤드루 카네기가 연합해서 펼친 로비의 결과였다. 이 특허권은 테슬라가 숨진 1943년 미국 대법원의 판결로 테슬라에게 되돌아갔다. 그러나 마르코니는 이미 1907년 라디오 발명으로 노벨상을 받은 뒤였다.

임금 체불에서 시작된 에디슨과 테슬라의 악연은 평생 동안 테슬라를 괴롭혔다. 에디슨은 국가 전력망을 직류(DC)전기로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교류전기의 보급을 방해했다. 에디슨은 “교류전기는 사람을 죽이는 데나 쓸모있다”라며 사형집행용 전기의자를 만들어 일반에 공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기의자는 공개시험에서 실패, 에디슨이 도리어 망신을 당했다.

에디슨의 집요한 방해로 교류전기 사업을 추진했던 웨스팅하우스일렉트릭은 파산위기에 몰렸다. 테슬라는 교류전기가 더 쉽게 보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특허권을 스스로 포기했다. 그가 특허로 막대한 수입을 챙기려 했다면 교류전기의 보급은 상당기간 지연됐을 것이다.

빚에 시달리던 테슬라는 1943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는 죽기 전 전자기(電磁氣)와 중력 현상을 일관된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통일장 이론’(unified field theory)을 완성했다고 주장했으나 물리학계는 이를 “허튼 소리”라고 일축했다. 테슬라가 사망한 직후 미 연방수사국(FBI)은 그의 말년 연구 노트를 압수한 뒤 ‘일급 기밀’로 분류했다. 이 노트에는 강력한 광선 무기 등에 관한 연구가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진상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영화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뤼미에르 형제보다 먼저 영화 카메라를 만들고 촬영에 성공한 인물이 있었다. 에디슨의 조수였던 윌리엄 딕슨이다. 딕슨은 또 현재 널리 쓰이는 35㎜ 필름을 최초로 사용한 인물이다. 그가 에디슨에게 버림받지 않았다면 영화의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딕슨은 1860년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 예술가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9년 19살이었던 딕슨은 발명왕 에디슨에 관한 신문기사를 읽고 감동했다. 그는 4년 뒤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가 에디슨을 찾았다. 에디슨의 연구실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그는 1888년부터 활동사진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딕슨은 끈질기고 성실한 성격이었다. 관련 발명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기술을 익히고 문제점을 보완한 끝에 1890년 ‘키네토그래프’라는 최초의 영화 카메라를 발명했다. 그가 자신의 손 흔드는 모습을 촬영한 ‘딕슨 그리팅’(Dickson greeting·1891년)은 최초의 활동사진으로 남아 있다.

에디슨은 1891년 여성단체 회원에게 이 발명품을 공개했다. 영화의 관람은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필름을 렌즈가 달린 작은 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키네토스코프’로 불린 이 상영기는 상류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다. 딕슨은 다수의 대중이 영화를 보려면 영사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에디슨은 “상업성이 없다”며 영사기 연구를 금지시켰다.

딕슨의 손이 묶여 있는 동안 뤼미에르 형제는 1895년 영사기가 달린 영화 카메라를 발명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딕슨은 에디슨 몰래 영사기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에디슨에게 들켜 결국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딕슨은 이후 자신의 영화사를 차리는 등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에디슨의 견제 등으로 판로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1897년 영국으로 돌아간 뒤 남아프리카 보어전쟁을 무비 카메라로 담기도 했으며 최초의 전쟁 카메라맨으로 활동했다. 그는 1935년 잉글랜드 트위큰햄에서 숨졌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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